사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두루두루 잘 지냈고, 살면서 누군가와 크게 싸워본 기억도 별로 없다.
화가 나더라도 참고 넘기는 편이었고, 눈치가 빨라서 누군가 기분이 상한 것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 ‘큰 문제 없이 살아온 사람’이라고 여겼다.
결혼 전의 나는 엄마, 아빠에게도 고맙다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 정도면 성격도 무난하고, 특출나지는 않아도 내 밥값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사춘기도 없었다. 사춘기가 어떤 감정인지조차 잘 모른 채 그 시기를 그냥 지나왔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마치 늦은 사춘기를 겪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에 대한 질문이 끝없이 생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사춘기 때 했어야 했던 것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꿈이 없었다. 그냥 학교에 다녔고, 수업 시간엔 멍하니 앉아 있던 기억이 많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막 놀던 학생도 아니었다.
항상 딱 중간, 딱 평범. 잘하지도 못하고, 못하지도 않은 상태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자신감도 늘 부족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살면서 이게 큰 문제라고 느끼진 않았다.
그럭저럭, 남들처럼 평범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아이를 낳으면서부터였다.
나는 내가 꽤 잘 자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정서적으로 꽤 불안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가 늘 불안한 상태로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 불안이 아이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워졌다.
돌아보니 사춘기가 없었던 이유도 어렴풋이 보인다.
나는 살면서 화를 내본 적도, 짜증을 마음껏 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엄마는 늘 나보다 더 큰 감정으로 나를 눌렀고, 나는 그저 맞추는 쪽을 선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참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했고,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안다. 그건 ‘괜찮음’이 아니라 정서적인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접어두는 방식이었다는 걸.
그리고 나는 이제 아이를 키우면서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잘 크지 못한 나’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해주지 않았던 말들, 누군가 안아주지 않았던 순간들에 대해 이제 와서 원망만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대신 나는 지금의 나에게 그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불안해도 괜찮다고, 모르겠어도 괜찮다고, 그래도 한 걸음씩 가면 된다고
나 스스로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뿐 아니라 나 자신도 함께 키우고 있다.
완벽한 어른은 아니지만, 도망치지 않는 어른이 되기로 했다.
누가 만들어준 길이 아니라 늦더라도, 서툴더라도
내 감정으로, 내 방식으로 나의 삶을 다시 개척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아이에게만큼은 “너는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말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다.
그 말을, 사실은 나 자신에게도 해주면서.